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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

옥산뜰농부 2011. 11. 15. 07:09

   박연 朴堧
 


 

박연 朴堧

 

1378년 음력 8월 20일~1458년 3월 23일

 

조선 초기의 문신, 음악가이다. 초명은 연(然), 자는 탄보(坦父), 호는 난계(蘭溪)[1] 또는 송설당(松雪堂)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밀양 박씨 난계파조이시다.


1378년(고려 우왕 4년)생으로 아주 총명하고 학문이 탁월하였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시묘를 6년하여 1402년(조선 태종 2년)에 조정에서 효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405년(태종 5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1년 문과에 제1위(장원)로 등과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집현전 교리(敎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 찬집(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3년 후 다시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했다. 1431년 남급(南汲)·정양(鄭穰)과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채택케 하고, 조회와 회례에서 종전까지 기생이 추던 춤을 무동(舞童)으로 대치하여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하여 궁정 음악과 예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1433년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되어 아악에 종사하였으며, 공조 참의·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145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 부윤(仁壽府尹)·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다가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1454년(단종 2) 계유정난 때 아들 박계우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3조(三朝)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파면되어 고산으로 유배되었다.고산  유배중 가훈 17장을 지으니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 ~ 1746)가 서문을 찬(撰)하였다.


 

사후 1767년 영조 43년 문헌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197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영동에 난계사를 세우고 1973년부터 매년 연례행사로 난계예술제를 지내고 있으며 서울에 난계로와 난계공원이 있다.


 

특히 적(笛)의 명연주가였으며 조선 초 미비한 궁정 음악을 정비하여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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