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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옥산뜰농부 2011. 11. 15. 07:25

 

밀양 박씨

密城大君 박 언침(彦仁沈)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제 54 대 경명왕의 맏아들로 경명왕이 여덟 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밀성대군 (密城大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성(密城) 이 뒤에 밀양(密陽)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 밀성박씨라고도 한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전설로만 밀양읍 영남루 광장에 있었다고 전해져 오다가 1921년 여름, 심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를 이루면서 영남루 북쪽 광장에 드러난 커다란 구덩이가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해 밀성대군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 하고 있다.

밀양박씨의 세계는 밀성대군 박언침의 8세에서 6파로, 그 아래에서 다시 6파로 나뉘어 크게 12파로 분파되어 파마다 중조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각기 또 여러 소파로 분파되어 내려오고 있다. 12파로는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언부(彦孚)파,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 언상(彦祥)파, 좌복야공(左僕射公) 언인(彦仁)파(시조 37세손), 밀직부사공(密直副使公) 양언(良彦)파, 판도판각공(版圖板刻公) 천익(天翊)파, 삼사좌윤공 (三司左尹公) 을재(乙材)파, 규정공(糾正公) 현(鉉)파,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원(元)파, 밀성군(密城君) 척(陟)파,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미(中美)파, 영동정공(令同正公) 원광(元光)파, 정국공 (靖國公) 위파 등으로  나뉜다.

그 중 규정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전체 밀양박씨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물 또한 규정공파, 밀성군파, 좌복야공파, 사문진사공파 등에서 많이 배출했다.

밀양박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61명, 상신 1명, 문형 1명, 청백리 2명, 공신 6명, 장신 1명을 배출했다. 특히 문과 급제자 261명은 우리나라 전체 씨족중에서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청주한씨, 광산김씨에 다음가는 숫자인데 비해 상신과 문형이 적었다는 것은 밀양박씨가 조선조의 정치 권력 구조에 깊이 찹여하지 못했음을 뜻하며, 그 원인은 밀양박씨와 왕실 권력과의 상관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규정공파의 중추적인 인물로는 나산경수 박강생(朴剛生)과 그의 아들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을 들 수 있다. 박강생은 규정공(糾正公) 현(鉉)의 현손으로 고려 말에 집현전 제학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태종∼세종대에 수원부사, 안변부사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충정공(忠貞公) 박심문은 박강생의 아들로 절신으로 유명하다. 1436년(세종18) 친시문과에 급제, 기주관, 평안도 판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1453년(단종1)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가 살해되자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成三問)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중 1456년(세조2) 질정광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성삼문 등이 참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 끝에 음독 자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은 심문의 중형 절문의 아들로 계유정난에 가담, 정난공신 2등으로 밀산군에 봉해지고 세조 때 공조,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또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니 공간공(恭簡公) 박건(朴楗)은 중손의 아들로 단종 때 문과에 급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내고 중종 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3 등 으로 밀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은 박조의 아들로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 교리, 영월군수 등을 지내고, 1546년(명종 1) 성천부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 후 사가독서를 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호당을 거쳐 대사성, 우부승지를 역임한 후 명종 때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선조조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 후 동부승지, 대사성, 양관대제학,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문장공(文莊公) 박계현(朴啓賢)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냈다.

충정공(忠靖公) 박숭원(朴崇元)은 충원의 종제로 도승지,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죽은 뒤 호성공신에 추록되고 밀천군에 봉해졌다. 밀양박씨가 낳은 유일한 상신 숙민공(肅愍公) 박승종(朴承宗)은 선조조에 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무렵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인목대비를 시해하려고 흉모를 꾸미자 그는 이를 적극 말리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등 폭정에는 휘말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는 아들 자흥(自興)의 딸이 광해군의 며느리로 세자빈이 되어 그 일족이 권세를 누렸음을 자책하고 스스로 목매어 자결했다. 이 외에도 중종대의 무신으로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제자를 길러낸 문목공(文穆公) 박영(朴英), 영조 때 문과에 급제, 참판 등을 지내고 <돈령록(敦寧錄)>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문헌공(文憲公) 박성원(朴聖源) 등이 유명하다.

사문진사공파에서는 정재(貞齋) 박의중(朴宜中)이 고려 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 검교 참찬이 되었다. 그는 성리학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다.

의중의 손자 평간공(平簡公) 박거겸(朴居謙)은 무신으로 당대의 손꼽히는 명궁이었다. 그는 도총관,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성종 때 좌리공신으로 밀산군에 봉해졌다.

이정공(夷靖公) 박열(朴說)은 중종 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박종남(朴宗南)은 무신으로 선조 때 호적(胡賊) 니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야인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李舜臣)의 주사 조방장이 되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들 충장공(忠壯公) 박영신(朴榮臣)은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막다가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서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던 중 포로가 되어 참살을 당한 절신이다.

左僕射公파의 인물로는 문헌공(文獻公) (中祖:彦仁9世孫)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박天錫의 아들로 1405년(태종5) 문과에 급제, 집현전 교리, 지평, 문학 등을 역임하고,세종 즉위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당시 조율이 불완전한 악기 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주장,편경 12매를 제작하는 등 궁전 음악의 미비점을 대폭 변경,수정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 중추원 부사 등을 역임,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의 명음악가로서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으로 불리운다. 영동의 초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악기를 개량하는 등 민족 음악 발전에 큰 업적을남겼다. 그의 사촌 박흥생(朴興生)은 세종 때 13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7세에 생원이 되었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밀성군파에서는 파조 박척(朴陟)이 충선왕 때 흥위위의 무장으로 공이 있어 밀성군에 봉해 졌다. 그의 7세손 박척(朴瘠)은 정종의 부마가 되어 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청숙공(淸肅公) 박신규(朴信圭)는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충간공(忠簡公) 박이서는 척의 11세손으로 선조 말에 이이첨(李爾瞻)을 논핵하다 파직되고 광해군 때 폐모론이 나오자 대북파를 탄핵하다가 삭직당한 후 복직되어 진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해상에서 풍랑으로 행방불명 되었다. 그의 7세손인 효정공(孝靖公) 박장복(朴長復)은 순조 때 판서를 지냈고, 문정공(文貞公) 박승휘(朴承輝)는 척의 11세손으로 순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삼조보감(三朝寶鑑)> 편찬에 참여했다.

위에서 열거한 각 파의 주요 인물도 인물이지만 밀양박씨는 영조∼정조대에 실학의 대가 박제가(朴齊家)를 배출하여 더욱 유명하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으며,이덕무(李德懋), 류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시문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2)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이조원(李調元) 등 청나라 학자들에게 새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실사구시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했고,다음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1794년 춘당대 무과에 장원하고 오위장을 거쳐 그 후 영평현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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