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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걸어서 낙안군, 살아있는 한반도의 역사교과서 길 (국토종단 필수 코스)

옥산뜰농부 2010. 8. 29. 20:04

걸어서 낙안군,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낙안읍성에서 태백산맥문학관까지의 우리천올레길

남도TV, namdotv@naver.com

등록일: 2010-07-01 오전 8:34:41

‘우리천올레길’은 낙안천과 벌교천을 따라 낙안읍성(순천시 낙안면 소재)에서 태백산맥문학관(보성군 벌교읍 소재)까지 걷는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길’이다. 이 길은 옛 낙안군의 선조들이 걷던 길로 조선시대부터 근 현대사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길이다.

[글 작성에 앞서]

낙안군은 100여 년 전까지 현 순천시와 보성군 사이에 있던 행정단위다. 일제침탈이 이뤄지던 초기 강제로 폐군되고 지역민들은 세 곳 (순천시/보성군/고흥군)으로 분리 합병됐다. 불행한 것은 해방이 됐지만 그대로 고착화 돼 옛 낙안군민들은 100여 년 넘게 변방인 으로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한 조상을 모시던 한 형제가 외세에 의해 갈려 남이 된 낙안군의 역사를 보고 있으면 그것은 어느새 한반도의 역사가 돼 버린다. 지역의 역사가 아닌 한반도의 역사인 듯 착각까지 드는 옛 낙안군.

필자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반도를 종주하는 심정으로 옛 낙안군을 걸었다. 행정구역이 달라 별개로 생각하는 순천시의 낙안읍성과 보성군의 태백산맥문학관을 동시에 돌아봤다. 그곳엔 분명 한반도의 역사가 숨어있었다.

 
▲ 옛 낙안군 전경 
ⓒ 김남표
걸어서 낙안군, 그 곳은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내가 걸었던 그 길, 이제는 모두와 함께 걷고 싶다)

전라남도 동남부 현, 순천시와 보성군 사이에는 100여 년 전까지 낙안군이 존재했었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군되고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지금도 당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라 부른다.

옛 낙안군 지역은 현, 순천시 외서면과 낙안면, 별량면 일부 그리고 보성군 벌교읍과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를 말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분지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고 그 중앙부를 가로질러 낙안천과 벌교천이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낙안읍성이 낙안천 상류에, 일제강점기는 물론, 여순사건과 분단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소설 태백산맥문학관이 벌교천 하류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단지, 낙안천과 벌교천 8km 구간을 걷는 것만으로 모두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제1부 조선시대 읍성과 낙안군 팔경을 감상해보자
<여기는 조선시대, 낙안읍성 민속마을>

 

낙안읍성 동문을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여느 지방 중소도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 색다름이 있다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야와 자연이 인상적이었다는 정도. 하지만 성곽 안으로 발길을 옮기면 그곳엔 우리의 선조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 핏줄임을 증명하듯 모두를 탯줄로 연결했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낙안군의 치소였다.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이 가장 잘 돼 있는 곳으로 이름나 있으며 아직도 주민들이 생활하는 살아있는 민속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1397년 김빈길 장군에 의해 최초로 토성으로 완성됐고 이후 석성의 모습을 갖췄다.

1410m의 성곽 안은 700여 년의 세월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4~5백년은 족히 되는 거목들도 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초가집이었고 한 번도 다른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던 집들도 즐비하다. 복원했다는 동헌도 그 느낌 그대로다.

그런데 낙안읍성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 못지않게 마음으로 봐야 할 것들이 많다. 먼저 성곽 남서쪽 가장 높은 곳, 빈기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밀려드는 왜구에 맞서 성을 쌓고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지휘를 했을 김빈길 장군의 의로운 정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심었다는 낙안객사 뒤편의 팽나무도 의미가 깊다.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모으고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낙안읍성에 들러 3일간 머무르면서 낙안의 유지들과 국운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며 심었다는 나무,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지내고 나무를 심은 곳은 이곳이 유일한 곳인 만큼 특별하다.

보이지 않는 것 중에 봐야 할 부분은 15명에 달하는 기녀들이 거처했던 기방청이다. 한 시대의 시대상이며 읍성 거주인원의 10% 달하던 사람들이 생활하던 곳이었기에 머릿속으로라도 그려봄직 하다. 그 장소는 낙민루 앞이었다고 한다. 왜 기방청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역사는 그 시대의 기록이지 지금의 해석으로 넣고 빼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현재 행정구역이 다르다고 당시의 낙안군이었던 보성군 벌교와 고흥군 동강 대서 등의 인물을 낙안읍성에서 소외시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역사기록의 시점과 중요성을 이곳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의 첫 페이지인 낙안읍성이 현재의 눈으로 보면 평온하지만 역사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숨소리가 가팔랐던 조선시대다. 낙안읍성을 쌓은 이유가 왜구의 침입 때문이었고 200여 년이 지난 후 왜란을 준비했던 곳이며 또, 300여 년이 지난 후엔 그 왜구들에 의해 폐군됐기 때문이다.

<낙안군 팔경을 한눈에... 옥산 망해당 자리>

 

그렇게 조선시대를 뒤로 하고, 바다를 향해 열린 남문을 따라 낙안읍성을 나섰다. 멀리 뾰쪽한 산하나, 고흥의 길목을 지키는 첨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그리고 살짝 우측으로 비켜 앉은 해발 68m의 옥산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나를 유혹한다. 낙안읍성 남문에서 곧게 뻗은 직선도로를 따라 1.5km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산, 옥산.

옥산은 순천시 낙안면 옥산마을앞에 있는 산으로 넓은 낙안평야 중앙 부근에 유일하게 솟아있는 작은 동산이다. 작고 앙증맞지만 오르면 높은 산 못지않게 확 트인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자신이 높아서가 아니라 주위가 낮아 나타나는 재미난 현상이다.

이 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낙안읍성을 최초로 쌓은 김빈길 장군이 약 600여 년 전, 이곳에 망해당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낙안(군)팔경에 잘 나타나있다.

伯夷淸風(백이청풍) - 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고 청명한 바람
寶嵐明月(보람명월) - 보람산(현, 제석산) 위에 떠 있는 둥근 보름달
玉山翠竹(옥산취죽) - 옥산의 새 꼬리 형태의 암록색 대나무 군락
金崗暮鍾(금강모종) - 금강암에서 해질 무렵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
澄山宿露(징산숙로) - 징광산에 피어오르는 아침 이슬
平地浮槎(평지부사) - 낙안들(가운데 흐르는 천)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뗏목
斷橋魚火(단교어화) - 단교(홍교)에서 반짝이는 고기잡이 불빛
遠浦歸帆(원포귀범) - 포구로 돌아오는 고깃배의 아스라한 모습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김빈길 장군의 망해당은 없다. 더구나 정상에는 잡초와 나무들이 마구잡이로 자라나 600여 년간 내려오는 이 고장의 자랑거리인 낙안(군)팔경도 감상할 수 없게 됐다. 역사탐방로가 이 지역의 가치를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것인 만큼 중요 지점인 옥산은 낙안(군)팔경을 감상할 수 있게 새롭게 꾸밀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2부 분단의 길, 원등에서 중흥교까지
<마을길 하나 사이로 순천시와 보성군>

 

옥산을 내려오면 이제는 본격적인 분단된 한반도를 만나게 된다. 남과 북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임진강과 같은 낙안천을 만나게 되고 남과 북으로 나뉜 철원지역과 같은 곳인 원등마을을 지나게 된다. 한반도가 이념대립과 전쟁으로 갈렸다면 이곳은 일제의 인위적 행정구역 자르기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갈렸다.

분단으로 한반도가 졸지에 섬나라가 됐듯, 옛 낙안군이었던 낙안과 벌교 또한 폐군과 동시에 육지속의 섬마을이 되고 말았다. 옛 낙안군을 걸어보면 모두가 평지며 너나없이 같은 땅을 함께 부쳐 먹고 살고 있는데 낙안은 25km 떨어진 순천에, 벌교는 30km나 떨어진 보성에 호적을 올려놔 족보가 달라진 셈이다.

집은 순천시에 있지만 주소는 보성군에 있고 보성사람이지만 순천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 마을 공동체 생활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주소를 옮기지 못하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엄두가 나지 않아 가지 못한다. 그곳이 바로 한반도의 철원처럼 둘로 나뉜 원등마을 서너 가구의 이야기다.

그렇게 원등마을을 지나면 마을 앞에 있는 지동교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부터 중천(중흥)마을앞 중흥교까지의 약 3km 낙안천변 길은 임진강을 걷는 듯 한 느낌을 준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한쪽 둑은 순천시, 한쪽 둑은 보성군으로 느낌이 새롭다.

<지동교부터 중흥교까지는 비무장지대>

 

그렇게 크지 않은 개천으로 이어진 3km는 제3지대로 한반도로 말하면 비무장지대(?)다. 순천시 땅도 아닌, 보성군 땅도 아닌 그래서 그 누구도 관여를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지난 10여 년간 외지에서 건축폐기물 등을 차에 싣고 와서 버려도, 인근 주민들이 농사용 폐비닐 등을 버려도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치우는 법이 없다.

전국 하천 중 특정 구간 하나가 10여 년간 고질적인 쓰레기 투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곳은 이곳 낙안천 3km 구간이 으뜸일지도 모르겠다. 행정구역 사각지대라는 구조적 모순 때문인데 얼마나 골치 아팠으면 송내교 다리 난간과 전봇대에는 누군가 부아가 치밀어 올라 써 놓은 듯한 ‘쓰레기 투기자는 고발’이라는 라카칠이 수년째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3월말 이곳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천아낌이 (대표 정철회)가 쓰레기가 많은 하천변에 철쭉을 심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리도 방생했다. 우리 힘으로 낙안천과 벌교천을 가꿔나가자는 뜻인데 이런 작은 실천은 지역 단체도 참여하고 네티즌도 힘을 모으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들이 심어놨던 꽃과 오리가 보였다. 다시 버려진 땅으로, 쓰레기가 넘쳐나는 하천으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체계적으로 이 구간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송내교 부근에 걷는 이들을 위한 쉼터 겸 작은 쌈지공원을 조성해 자연의 소중함도 알리고 ‘생태하천문화축제’도 벌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3부 자연 산책길 중흥교에서 홍교까지
<편안하고 차분한 길 중흥교에서 홍교까지>

 

중흥교를 지나 홍교까지 가는 약 2.5km의 길은 우리천올레길 구간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차분한 길이다. 기존에 걷던 곳에 비해 하천 폭도 넓어지고 간간히 보이는 모래사장과 시원스럽게 나는 새들의 모습도 이런 기분을 부채질한다.

하천변으로 간간히 나무들이 있어 그늘을 만들어주고 굵은 모래가 섞여있어 평탄한 보행을 약속해준다. 갈대가 어른 키보다 더 높게 솟아오른 구간이 있는가 하면 이름 모를 풀들이 발목을 간질여주는 구간도 있다.

이 구간에서는 낚시꾼들의 모습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수문 근처에는 서너 명씩 그룹을 이뤄 낚시삼매경에 빠져있다. 가끔 밀짚모자를 쓴 낚시꾼을 발견할 때면 시간은 정지하고 마음은 더더욱 차분해진다.

홍교에 이르기 전에 12방천에 도착했다. 이곳은 모르는 지역민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왜냐면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피서지였기 때문이다.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 그리고 제법 깊은 수심은 여느 피서지에 뒤처지지 않았다. 여름철이면 너나 할 것 없이 한번쯤은 12방천에 몸을 담군 추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흐트러진 풍경으로 남아있어 못내 아쉽다.

드디어 홍교다. 현존하는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지금도 자유롭게 사람들이 건너다니고 있는 보물 제304호인 홍교는 벌교를 상징하고 있다.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벌여줄 정도의 다리이니 남다른 의미가 있다. 소화다리가 일제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을 때 민족의 다리로 꿋꿋하게 지켜 온 홍교는 우리천올레길 대미를 장식하는 상징물이다. 이곳에도 홍교회 (회장 이문수)에서 오리를 방생해 놓았다.

제4부 일제강점기와 이념대립의 현장 벌교와 태백산맥문학관
<벌교 태백산맥문학로와 태백산맥문학관>

 

홍교를 지나면 갑자기 혼돈의 시간들이 다가온다. 모든 것이 뒤섞여 용해돼 있는 갯벌처럼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면서도 갯벌의 찰지고 끈끈한 성질이 가슴에 와 닿아 그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 바로 일제강점기와 이념대립속의 벌교 때문이다.

현재 벌교는 한창 공사 중이다. 특히, 홍교부근에서 벌교역전까지 태백산맥문학로 정비는 일제강점기와 이념대립의 모습들을 더욱 또렷하게 담아 놓을 예정이다. 금융조합 건물 앞은 새롭게 길을 다듬고 있고 남도여관(보성여관)은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맡아 보수를 하고 있다. 한 번 걷는 것만으로도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그 태백산맥문학로를 지나 끝자락에 있는 1931년(소화6년)에 만들어진 소화다리에서는 오래 머물기를 주문한다. 일제강점기의 울분을 주먹 하나로 달랬던 역사와 이념대립 속에 하루에도 수차례씩 사상이 다른 이들의 주검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때 소화다리는 일본인들만 건너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다리 한쪽 편에 진을 친 조선인들이, 건너는 일본인을 향해 매서운 주먹을 퍼 부었다. 그것이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마라’는 얘기의 시작이다. 이념대립이 한창이던 여순사건 때는 하룻밤 사이에도 수차례 처형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손가락 총질에 빨치산이 끌고 나가고 진압군이 끌고 나가서 피투성이가 된 채 다리 아래 갯벌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산 중턱에 자리한 소설 태백산맥문학관에 오르면 조선시대 이후 혼란속 한반도의 근 현대사를 일목요연하게 느껴 불 수 있다. 지주와 소작인과의 갈등, 외세에 손을 내밀거나 민족을 부르짖은 사람들 사이의 증오, 이념대립속에서의 피의 복수. 그리고 분단.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는 태백산맥문학관에서 끝을 맺는다.

<낙안읍성>에서 조선시대를 느끼고 <홍교와 벌교읍내>에서 일제강점기의 뼈저린 교훈을 배우고 <소화다리>에서 이념대립과 갈등을 아파하고 <원등마을과 송내교>에서 한반도 분단을 확인했다. 불과 8km 걸었을 뿐인데 이 모든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은 특별한 여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걸어봐야 할 길로 이곳을 추천한다. (남도TV)









우리천올레길 낙안읍성에서 태백산맥문학관까지 기대효과
1.쓰레기로 골머리를 앓던 하천변을, 가꾸고 다듬어 ‘우리천올레길’로 조성할 경우 순천시와 보성군의 ‘자연(생태)과 건강’이라는 이미지를 한 단계 상승시킬 수 있다.

2.낙안군 폐군으로 인해 인근 지역으로 강제 병합됐던 옛 낙안군 주민들이 그동안 순천시와 보성군에서 다소 소외됐던 점을 상기하면 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3.지자체간 행정협력은 쉽게 보기 힘든 사례인데 이것을 계기로 지자체가 달라도 협력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창출 하는 ‘공동관광자원개발’의 선례를 남길 수 있다.

4.‘우리천올레길’ 조성은 현재 개별로 운영되고 있는 낙안읍성(순천)과 태백산맥문학관(보성)이 하나의 관광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아 시너지 효과를 내 지역발전으로 연결 될 수 있다.

5.생태 친화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우리천올레길’의 활성화는 지역 농가에 친환경농산물 생산을 부축일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자연도 살리고 농가소득도 올리는 길일 수 있다.

6.걷기대회, 자연생태축제, 문화축제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지역 가치를 창출해 내고 특정 구역이 아닌 지역 전체로 그 혜택이 확산될 수 있다.

7.자연은 미래의 가치이며 자산이기에 비교적 잘 보존 된 이 지역을 지금 적은 비용으로 가꾸고 다듬어 놓을 경우 미래엔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고 지역의 큰 자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의: 서정일 061-726-2525 / 017-239-0057 이메일: namdotv@naver.com)
우리천올레길 카페 : http://cafe.daum.net/wooriolleda
 

출처 : 우리천 올레길
글쓴이 : 올레지기서정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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